“가물에 돌(도랑) 친다”라는 속담이 있다. 요즘 말로는 “비 오기 전에 배수로 공사한다” 내지 “신입사원일 때 적금부터 들어놓는다” 정도일 것이다. 농사로 먹고살려면 물 수급이 가장 중요하니까, 가물어서 모래만 퍽퍽 날릴 때부터 도랑(수로)을 만들어놓아야 비가 올 때 논에 물이 원활하게 공급되고, 홍수 대비도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말이 쉽지 한창 가뭄 때 있지도 않은 물길을 만든답시고 땡볕에 마른 땅을 파고 있자면, 이게 무슨 삽질인가 답답하고 우스웠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힘들고 부질없어 보여도,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결국 낭패를 본다. 재작년 홍수 때처럼 일단 지하에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미 손쓸 방법이 없다.
필자가 인공지능(AI) 신뢰성 문제를 지적해 온 것이, 지면상으로만 놓고 봐도 5년째가 된다. 그간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AI 신뢰성, 특히 기술의 ‘윤리성’ 문제가 단지 사용자의 도덕적 각성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 어디까지나 맞춤화된 기술로써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관련된 전문 인력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잠깐 행복한 꿈을 꿔 본다. 필자 주장처럼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사회적 실천이 있었다면? 구상대로라면 5년 사이에 1,000명 정도의 전문인력이 나올 수 있었고, 그랬다면 국내 업계는 이미 세계 시장을 제패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일이란 게 뜻대로 풀리지는 않으니까 그 10분의 1, 전문가 100명만 있었어도 한국에는 최소한 AI 신뢰성 분야의 방탄소년단, 블랙핑크가 나와 있었을 것이다. 5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야 전 세계가 허둥지둥 AI 윤리 관련 규제를 만들면서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선지자인 척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이미 기회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로서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회가 있었던 건 우리나라가 워낙 기술 트랜드에 민감하고, ‘알파고’ 이슈와 ‘이루다’ 사건 등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해당 분야에 쏠릴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은 그 관심과 에너지가, 이루다의 말실수 타박이나 하면서 “먼저 모두가 완벽하게 도덕적으로 되어야만 기술의 윤리성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라는 훈계 식의 공론(空論)으로 낭비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론이 말초적인 데 휘둘릴 때 제 역할을 해줬어야 할 관련 부처 또한 필요한 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AI 기술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면 개발사 질책에 그치지 말고, 신뢰성의 기준을 만들고 그것을 검증할 전문가를 육성해야 했다. 하지만 ‘교육’과 ‘소프트웨어 산업’이 생각 이상으로 엄격히 분리되어 있는지, 오랜 연구로 만들어낸 전문가 육성방안은 ‘수요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소프트웨어 부처와 교육 부처 간 계속 떠넘겨질 따름이었다.
목표가 좌절됐을 때 나라 탓, 사회 탓을 하는 건 공학자의 역할이 아니다. 필자는 여전히, 우리의 공공 영역이 이 문제에 선도적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다면 한탄하는 대신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다른 과정을 찾는 게 옳다. AI 신뢰성 교육과정을 전문가 자격증 방식으로 도입하려는 움직임은 해외에서 이미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TRAIN(TRustworthy AI International Network)이라는 이름의 국제 연합체에 참여하고 있다. TRAIN이라고 함은, 기차가 철로와 기관차만 있으면 열 량이고 스무 량이고 목적지를 향해 함께 달릴 수 있듯이, 사회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만의 철로를 만들어서라도 국경 없이 함께 목표를 이루겠다는 취지다. 그러기 위한 기관차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문가 양성(train)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렇게 아세안의 공공기관과 한중일 민간단체가 함께, 오는 2월 22일 서울에서 첫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비 오기 전에 도랑을 파자는데 마을 사람들이 비웃기만 한다면, 이웃 마을 힘을 빌려서라도 내 종자, 내 작물을 키워야 한다. 이미 전 세계 하늘에는 비구름이 덮이고 있기 때문이다. AI 신뢰성을 규제하는 흐름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면, 거기 휩쓸려가는 쪽과 그것으로 자기 논을 풍요롭게 만드는 쪽이 확실하게 갈릴 것이다. 가능하면 우리 마을만의 힘으로 도랑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아직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면, 해외 기관에 매달려서라도 우리는 준비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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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디지틀조선일보 김동원 기자